죽기전에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 많으시죠? 이 글에서는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70권의 저서와 450여 편의 논문을 출판할 수 있게 해준 그만의 독특한 메모 및 지식 개발 기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니클라스 루만의 성과
루만은 대학을 졸업하고 약 10년간 공무원으로 생활하다가 퇴직한 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42세 즈음 부터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됩니다[efn_note]니클라스 루만 – 위키백과[/efn_note]. 이후 30년 간 사회학을 연구하며 사회 체계 이론을 수립하고 사후엔 20세기 최고의 사회학자라는 평을 듣게 됩니다[efn_note]세상을 ‘체계’로 이해한 루만 사회학의 정수. 한겨레[/efn_note].
루만의 저작은 70권의 저서와 450여 편의 논문입니다. 대부분 혼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하고 글쓰는게 본업이었다고는 해도 연 평균 도서 2.3권과 논문 15편을 쓴 셈이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다작의 비결은 메모 상자
인상적인 생산성의 비결에 대한 물음에 루만은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하지 않는다. 주로 메모 상자에서 발생한다’며 메모 상자에 그 공을 돌렸습니다. 루만은 평생 9만 개의 메모 카드를 작성했는데 책을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썼으며 책과 논문은 메모 상자 안에서 확장되고 연결된(branched out and networked) 생각과 아이디어들의 응축물이자 표현이라고 하였습니다[efn_note]Missing Link: Luhmanns Denkmaschine endlich im Netz[/efn_note].
루만의 제텔카스텐 방법
메모 상자를 저술에 활용한 것은 루만이 처음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도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등이 메모를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efn_note]메모 상자 – 위키백과[/efn_note]. 루만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만의 독특한 메모 작성 및 관리 프로세스 때문입니다.
루만은 1992년에 메모 상자와의 소통(독어 Kommunikation mit Zettelkästen, 영어 Communications with Zettelkastens) 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였습니다[efn_note]Improved Translation of “Communications with Zettelkastens”[/efn_note]. 이 에세이에서 자신이 26년 이상 사용하고 검증한 연구 방법으로 제텔카스텐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메모 상자를 장기간의 연구를 도와주는 커뮤니케이션 파트너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루만이 작성한 메모 카드는 https://niklas-luhmann-archiv.de/ 에 디지털 형식으로 아카이브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누구나 그가 남긴 메모 원문과 메모 간의 연결 관계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라인에 제텔카스텐을 소개하는 자료가 많은데,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고, 특히 디지털로 제텔카스텐을 구현하려는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분들도 많고 시행착오를 겪는 분들도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디지털로 시도했었고 ‘이렇게 하는게 맞나?’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아날로그 방식이 원조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본인이 직접 소개한 글과 원본 자료가 있는 상황이니 이를 토대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겁니다. 스콧 쉐퍼는 루만의 에세이, 온라인 아카이브, 그리고 루만에 대한 연구 논문을 토대로 루만이 사용한 제텔카스텐 방법을 분석하고 ANTI 라는 두문자로 정리했습니다[efn_note]ANTINET ZETTELKASTEN, a knowledge system that will turn you into a prolific reader, researcher, and writer.[/efn_note].
A: Analog 아날로그
N: Numeric-Alpha 영숫자 주소
T: Tree 트리 구조
I: Index 인덱스
A 아날로그
루만은 종이 메모 카드와 메모 상자를 사용했습니다. 1998년에 돌아가셨으니 연구 활동을 하시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죠. 스콧 쉐퍼는 그의 책에서 아날로그의 장점을 질릴 정도로 어필하는데요. 요약하자면 아날로그의 모든 단점이 지식 개발에 있어서는 장점이 된다는 겁니다. 아이러니 하죠? 예를 들면 종이 메모 카드는 지면에 한계가 있고, 수정하기가 어려우며, 돈도 많이 듭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종이 메모 카드를 쓸 때는 정말 중요한 내용만 선별해서, 내용을 충분히 소화해 내걸로 만들어 압축하여 써야합니다.
손필기가 나은지 타이핑도 문제 없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보이는데, 메모를 작성할 때 뇌를 충분히 쓰게 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편한 걸 추구하기 때문에 디지털로 한다면 의식적인 노력이 더 필요할 겁니다. 차라리 아날로그 방식을 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고비용 환경에 놓이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N 영숫자 주소
루만은 메모 카드마다 영숫자로 된 식별자를 표시했습니다. 오늘날의 웹문서 주소, URL 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주소는 메모 카드와 다른 메모 카드를 연결하거나, 메모 카드를 배치 할 때 그리고 인덱스에 활용됩니다.
T 트리 구조
메모 카드를 상자에 마구잡이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텔카스텐에서는 비슷한 내용을 가까이 배치합니다. 새로운 카드를 추가할 때 기존에 있던 카드 중 가장 관련이 있는 카드를 찾아 앞 이나 뒤로 배치합니다. 이때 기존 내용과 연결되거나 기존 내용을 확장하는 내용이 있다면 기존 카드의 하위 수준으로 추가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특정 분야의 지식이 가지쳐 나가면서 풍부해집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기존 메모들을 다시 읽게 됩니다.
I 인덱스
메모를 빠르게 찾기 위해 인덱스용 카드를 별도로 작성했습니다. 가나다 순으로 찾을 수 있는 리스트 인덱스와 특정 주제에 해당하는 메모를 찾기 위한 키텀 인덱스, 저자명으로 된 인덱스 등을 사용했습니다.
서지 카드 (Bibcard)
루만은 상자에서 꺼내지 않고도 내용을 확인하기 쉽도록 카드 앞면 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뒤를 모두 사용한 카드도 있었는데요. 바로 서지 카드입니다. Bibcard 라는 표현은 스콧 쉐퍼가 만든 표현으로 보이고, 온라인 아카이브에서는 Bibliographie 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서지 카드의 앞장에는 서지 정보를 적고 뒷면에는 페이지와 짧막한 메모들이 적혀있습니다. 위 카드는 스펜서 브라운의 Probability and Scientific Inference 를 읽으면서 남긴 메모로 보이네요. 이 서지 카드들만 별도의 상자에 모아 두는데 책의 중요 부분만 모아둔 인덱스가 되는 셈이죠.
왜 효과적일까?
앞서 살펴 본 루만의 제텔카스텐을 프로세스 관점에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새로 알게 된 내용이나 생각을 메모 카드에 적고, 기존 메모 중 가장 유사한 메모를 찾아 배치합니다. 이때 기존 메모와 연관이 있어서 하위로 들어가게 되면 자연스레 기존 메모와 연결이 됩니다. 필요시 멀리 있는 카드와도 연결하고 인덱스에도 추가합니다.
새로운 카드를 추가할 때 마다 기존 지식과 비교해 보는 것. 여기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메모를 써서 쌓아두기만 하고 다시 꺼내서 읽은 일엔 소홀하곤 합니다. 적절한 위치를 찾기 위해 메모 상자를 뒤적거리고, 인덱스를 훑어보는 과정에서 기존에 내게 강한 임팩트를 줘던 지식들에 다시 노출되고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들이 부딪히며 스파크를 일으키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이를 체험할 만큼 메모를 쌓진 못해서 ‘다고 합니다’라는 식으로 표현했는데요. 더 해보고 체험하게 되면 다시 돌아와 표현을 바꿔두도록 하겠습니다. 🙂
글쓰기와의 관계
앞서 루만이 “책과 논문은 메모 상자 안에서 확장되고 연결된 생각과 이이디어가 응축되고 표현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했는데요. 글 초입에서 이 표현을 읽었을 때랑 지금 다시 읽어봤을 때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시리라 생각합니다.
루만의 방식으로 메모를 꾸준히 작성하다보면 특정 분야에 트리 구조로 아이디어들이 모여있게 될 겁니다. 이렇게 정리된 내용들을 다듬어 글을 작성하기 때문에 글쓰기 생산성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아래 이미지는 함께 스터디했던 분이 본인의 아날로그 제텔카스텐 경험을 정리한 글을 써서 공유해주셨는데, 글 말미에 메모를 활용하여 수월하게 쓸 수 있었다는 내용을 캡쳐한 것입니다.
아날로그 vs 디지털
A는 당시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N과 T는 종이 간의 하이퍼텍스트를 구현한 것, I 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만은 1988년에 한 인터뷰에서 “컴퓨터가 너무 늦게 나왔다.” 고 했다고 합니다[efn_note]Defining Moment: Niklas Luhmann’s index card system prefigures hypertext, 1956[/efn_note]. 그가 조금 더 늦게 태어났다면 컴퓨터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손글씨를 쓰고 메모 상자를 관리하는 것보다 위키나 디지털 노트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제텔카스텐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지 ‘제텔카스텐용’을 표방하는 다양한 도구들도 등장했습니다. 옵시디안, 롬 리서치, 제틀러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런 제품들 뿐만 아니라 위키 만으로도 충분히 제텔카스텐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위키야 말로 하이퍼텍스트의 정수라고 할 수도 있지요.
종이로도 저런 생산성을 냈는데 디지털로 하면 완전 대박이겠다! 라고 생각하며 디지털 제텔카스텐을 시도하지만 많은 분들이 실패를 경험합니다. 저도 옵시디안으로 첫 발을 내딛었지만 실패했었고요. 왜일까요? 스콧이 주장하는대로 아날로그로 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걸까요? 그렇진 않다고 봅니다. 기능적인 편리함 보다는 프로세스와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보입니다. 디지털 제텔카스텐을 잘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프화가님이 있습니다. 엘프화가님이 쓴 제텔카스텐. 봐도 모르겠다를 읽어보면 니클라스 루만이 쓴 에세이를 읽고 제텔카스텐의 목적과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나서 훨씬 나아졌다고 합니다. 즉, 어떤 도구를 쓰느냐 보다는 원리를 이해하는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도구를 막론하고 기존 지식과 새 지식을 끊임없이 비교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이고, 엘프화가님이 말씀하신대로 자료(정보)와 지식을 구분하여 지식 관리/개발 도구로서 제텔카스텐을 활용한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마치며
간단한 프로세스만으로 지식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수 있을거라는 기대와, 이 기대를 현실화 해줄 것 처럼 보이는 매력적인 도구들에 매료되어 곧장 옵시디안을 설치하고 제텔카스텐을 시도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나?’ 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제텔카스텐 관련 독서 모임을 발견했는데, 여기서 디지털 변형이 아닌 루만이 사용했던 방법을 분석한 스콧 쉐퍼의 책 ANTINET Zettelkasten 을 만났습니다. 당시에 이런 소감을 남겼었네요 ㅎㅎ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계기를 통해 평소 궁금해하던 실제 루만이 사용한 방식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 셈인데, 혼자 알고 있긴 아깝단 생각을 했어요, 또 저처럼 디지털 제텔카스텐을 시도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에게 원조의 방법을 알려드리면 도움이 될 수 있을거 같아 이렇게 블로그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원리는 깨우친 것 같지만 실천을 해봐야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여 아날로그 방식의 제텔카스텐을 먼저 해보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텔카스텐이 익숙해지고 나면 그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로 잘 옮겨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방식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메모 상자가 있는 곳에서만 작업이 가능하다던가, 예상치 못한 손상이나 유실이 발생할 수도 있다던가 해서 디지털로 전환을 하던 보완을 하던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지식 생산성 향상을 바라며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지식 생산성, 지식 관리, 제텔카스텐 등을 주제로 서로 소통하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