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텔카스텐』, 이런 분들은 읽지 마세요

제텔카스텐은 학계 연구자와 비소설 작가를 대상으로 더 나은 글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는 순간 어디서 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해지 현상을 백지의 공포라고 한다. 저자는 백지의 공포에 빠진 상태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잔기술을 알려주는 책이나 강좌는 많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제텔카스텐이라는 연구 및 집필 방법론을 소개한다.

제텔카스텐

제텔카스텐은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사용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어로 제텔은 메모 카스텐은 상자이다. 그는 종이 메모를 상자에 모아 활용하는 이 단순한 방법으로 보통의 학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책과 논문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메모 상자는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아래는 책 표지 일러스트를 그리신 재수님의 멋진 메모 상자이다.

재수님의 메모 상자

메모를 활용한 저술 방법은 루만이 최초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루만 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살았던 다산 정약용도 종이 메모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독일에 거주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독일에서는 학교에서 교과서 대신 낱장으로 된 프린트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어릴 때부터 이를 관리하기 위해 바인더 등을 활용한다고 한다.

단순히 종이 메모를 상자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활용한 루만 만의 연구/저술 프로세스가 있었고 이것이 히트 치면서 “제텔카스텐”하면 루만의 방법을 일컫는 것이 되었다.

책에는 루만의 제텔카스텐 방식에 대한 설명은 그리 길지 않게 나온다. 루만식 제텔카스텐의 장점으로 ‘단순함’을 들었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 있다. 요약하면 규격화된 종이에 연구 분야의 글을 쓰고 이를 기존 노트 중 가장 가까운 위치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잘 찾을 수 있게 종이마다 일련 번호를 붙이고 인덱스를 관리한다. 심하게 말하면 이게 다다.

단순하지만 이 방식을 활용하려면 기존의 연구/저술 프로세스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제텔카스텐을 실천하고 있는데 저술 프로세스는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그렇다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메모와 노트

내가 제텔카스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메모를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뭔가 많이 적는거 같은데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메모를 쓰고 연결하다보면 너도 고퀄리티 글을 마구 생산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가 꽤나 매력적이었다. 1년 정도 이래 저래 시도해봤지만 결과적으로 제텔카스텐은 내 기대에 부응하는 메모법이 아니었다.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메모와 그들이 말하는 메모가 서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이 책을 읽으면서 확고해졌다.

내가 메모라고 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적어 놓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 기억하고 싶은 것에 대한 힌트 등. 반면 그들이 말하는 메모는 잘 정제된 ‘글’이다. 아래 이미지는 챗GPT가 이야기 한 노트와 메모의 뉘앙스 차이이다. 학술적 정의나 사전적 정의와 다를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메모와 그들의 메모의 차이를 잘 표현하고 있어서 가져와봤다.

나는 메모법을 바랬지만 루만의 제텔카스텐은 연구/저술 프로세스였다. 메모 쪼가리를 마구 쌓고 연결하면 결과물이 짠 나타나는게 아니고 계속해서 조각 글을 쓰고 이를 기존의 것과 비교해가며 생각과 연구 결과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 책은 연구자비소설 작가가 대상독자이다. 연구자나 비소설 작가가 아니더라도 한 분야를 깊이있게 파고 들고자 하는 분은 활용할 수 있겠지만 ‘메모를 더 잘하고 싶어요!’, ‘메모를 더 잘 활용하고 싶어요!’ 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제텔카스텐은 여러분에게 적절한 도구가 아닐 것이다. 책의 부제는 ‘슬기로운 메모 생활’이지만 이는 책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품게 한다고 본다. ‘메모를 활용한 슬기로운 연구/저술 생활’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물론 판매량 관점에선 전자가 훨씬 나을 것이다 ㅎㅎ)

마치며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별로 안 좋은 책일거라는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작년에 안티넷 제텔카스텐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의 저자(스콧 쉐퍼)가 자신이 정통이고 이 책은 사이비라며 엄청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안티넷 제텔카스텐을 재밋게 봤고 제텔카스텐을 실행하는데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제텔카스텐을 다룬 다른 책들을 안 읽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크게 후회했다. 좀 더 빨리 읽어볼 걸… 스콧 쉐퍼의 말과 달리 꽤나 좋은 책이다.

다만, 연구자이거나 비소설 작가로서 연구/저술 프로세스를 바꿔볼 목적이 아니라 단지 메모법에 관심이 있어 읽으려는 거라면 크게 얻을 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용도에 맞지 않은 칼을 가지고 끙끙대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일상의 메모를 더 생산적으로 활용하고 싶다면 오히려 마에다 유지의 3단계 메모법이나 티아고 포르테의 세컨드 브레인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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