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부터 메모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디지털 기기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는 수첩에, 인터넷이 보급되고 디지털 노트 앱이 등장 한 이후에는 디지털 앱에 많은 메모를 남겨왔다. 메모를 더 넓게 정의한다면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에도 많은 양을 남겨왔고, 웹 클리핑 같은 단순 수집까지 치면 그 양은 훨씬 더 많이 늘어난다.
하지만 메모를 쓴 수첩은 지금은 어디있는지 찾을 수도 없고, 유행따라 여러 차례 옮겨타던 디지털 노트 앱과 북마크앱 들도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로그인을 안한지도 오래되었다. 그나마 블로그 만이 플랫폼을 바꾸면서도 계속 컨텐츠를 유지해오고 있는데, 이 녀석도 관리 소홀로 한 번 날려먹어서 예전 글들은 텍스트만 남고 이미지 파일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메모를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과 달리 내 인생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인식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의 메모 행위는 전에 비해 활력을 잃어갔다. 어차피 잃어버릴 수첩도 더이상 사지 않고, 어차피 읽지 않을 북마크도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어차피 다시 보지 않을 메모 앱에 노트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유일하게 이어가는 메모인 소셜 미디어는 순간 순간의 발설 욕구를 해소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내가 메모를 했던 이유는 순간 지나가는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중요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또는 머리속의 부담을 덜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20여년에 걸친 메모 경험은 나의 메모가 그 이유들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올해 우연한 기회에 제텔카스텐이라는 메모 기법에 대해 알게되었다. 나는 단순한 메모 기법을 통해 지적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에 금방 매료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어쩌면 남들의 인생은 풍요롭게 만들어 준 메모가 나에게만 그렇지 못했던 이유는 메모하는 방법의 차이에 있지 않나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추천받은 메모 앱인 옵시디안을 설치하고 바로 메모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트를 작성하고, 기존에 써 둔 노트 중 가장 비슷한 노트 가까이에 배치하고 연결한다는 그 간단한 방법이 나에게는 간단치 않았다. 뭔가 잘하고 있는게 맞나 계속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제텔카스텐 창시자는 어떻게 했을까? 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참여한 독서 모임을 통해 제텔카스텐의 창시자인 루만 교수가 실제 사용한 방법에 대해 깊게 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제텔카스텐은 그가 ‘사회학 연구’라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재직했던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연구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했을 때 “사회학 연구. 기간 30년” 이라고 제출했다고 하고 실제로 30여년간 사회학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 기간 내내 제텔카스텐을 활용하였다. 루만의 메모는 30년 간의 사회학 연구라는 결과물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루만 교수는 책과 논문을 다작 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사회학 연구라는 큰 결과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또는 중간 결과물)들이라고 생각한다.
제텔카스텐을 시작으로 다른 메모법에도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익한 교수의 유튜브를 보고, 티아고 포르테의 세컨드 브레인을 읽었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공통적인 내용이 있었다. 바로 메모는 활용을 전제로 해야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메모하는 이유을 바꾸기로 했다. 이전에는 잊지 않기 위해, 또는 나중에 언젠가 소비하기 위해 메모를 했다면 이제는 목적 달성을 위해 메모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무엇을 메모할 것인가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이에 대해서는 ‘무엇을 메모하는가’ 챕터터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놓치면 어쩌지? 하는 마음도 내가 메모를 했던 주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렇다보니 메모하는 대상이나 내용에 대한 이해도 함께 미뤄두는 경향이 있었다. 대충 어떤 것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메모하는가’ 챕터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메모를 할 때 글을 그대로 옮겨적기 보다는 내가 이해한대로 나의 언어로 적으려고 하고있다. 내 언어로 표현하려는 과정에서 외부의 정보가 내 지식으로 전환된다. 사실 이 과정은 원문을 그대로 메모할 때에 비해 훨씬 더 수고스럽다. 하지만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더 오래 기억하게 된다. 대충 빨리 수집하고 넘어가는 것에서 더 잘 이해하고 더 오래 기억하는 것으로 메모하는 이유가 바뀌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메모를 하는 이유에 대해 적어보았다. 요약하면 나는 당면한 사소한 프로젝트에서부터 인생 목표까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외부 정보를 더 잘 이해하고,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메모를 한다.
목적이 있는 메모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단순히 기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제텔카스텐도 관련 있는 메모끼리 연결될 수 있게 링크를 남긴 것 같고요.
메모의 목적이 논문(출간) 이었고, 메모를 활용하기 가장 좋은 건 책 출간 같습니다. 🙂
현석님도 그동안 쌓인 메모를 한번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전자책으로 출간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네~ 새로운 방식으로 메모를 작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존 것들로는 좀 어려울 것 같지만, 나중엔 메모들을 기반으로 책을 내보고 싶어요. 아직 정해진 주제나 제목은 없지만 애초에 출간을 목적으로한 주제를 정하고 메모를 쌓아나갈 생각도 해보고 있어요.